K-그라피 이성준 기자 | 가을은 내려앉는 계절이다. 잎은 위에서 아래로, 마음은 바쁨에서 성찰로 이동한다. 김미자 작가의 K-그라피 작품 ‘안도현의 가을엽서’는 이 ‘내려앉음’을 역설적으로 탑의 형식으로 쌓아 올린다. 시의 행들은 위로 향하지만, 뜻은 낮은 곳을 가리킨다. 그 긴장과 모순이 이 작품의 미학이다. 안도현의 시는 묻는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 김미자 작가는 이 질문을 글자의 배열로 답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구는 마치 수행자의 계단처럼 한 단 한 단 내려오며, 가장 큰 글자 ‘사랑’이 화면의 하부에 자리한다. 사랑은 가장 아래에 있다. 가장 무거운 것을 가장 낮은 곳에 둔 구성이다. 색채는 계절의 감정을 대변한다. 주황, 연두, 붉은빛이 겹겹이 쌓인 하단부는 낙엽의 군집이자, 삶의 흔적이다. 그 위에 놓인 먹의 검정은 장식이 아닌 결단이다. 글씨는 곧고 힘차지만 과시하지 않는다. 이는 명인의 기교를 숨기는 태도이며, K-그라피가 지향하는 의미 중심의 서체다. 이 작품은 읽히는 시가 아니라 올라가며 내려오는 시다. 눈은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고, 마음은 아래에서 다시 위를 돌아본다. 탑은 하늘을 향해 세워졌지만, 이 탑이 가리키는
K-그라피 이길주 기자 | 가을은 말을 걸어오는 계절이다. 박도화 작가의 K-그라피 작품 ‘서윤덕의 가을편지’는 그 말을 ‘앉으라’는 초대로 번역한다. 빈 벤치를 지키던 햇살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듯, 이 작품의 글씨 또한 관람자를 불러 세운다. 서 있는 마음을 내려앉히는 힘, 그것이 이 작품의 첫 인상이다. 작품 상단의 큰 글자 ‘가을’은 선언이 아니라 숨 고르기다. 힘 있게 쓰였지만 과장되지 않은 획은 계절의 절정이 아니라, 이미 기울기 시작한 빛의 온도를 담는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시구들은 일정한 간격과 리듬으로 배치되어, 마치 잔잔한 음악의 악보처럼 읽힌다. 이는 “가을 나무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라는 시어를 시각적 구조로 옮긴 결과다. 배경의 잎들은 하나하나 또렷하지만 군집을 이룬다. 낙엽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 타고 낙엽편지가 배달된다”는 문장이 그림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이다. 글씨는 그 편지를 여는 손짓이고, 여백은 그 편지를 읽는 시간이다. K-그라피의 본질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글은 읽히는 동시에 공간을 만든다. 박도화의 붓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이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그래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장미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상처의 이름이다. 이명순 작가의 K-그라피 작품 ‘노천명의 장미’는 그 상처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 끈 꺾어 보내 놓고”라는 시어처럼, 한 번의 결단과 파열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붓은 쓰다듬지 않는다. 꺾고, 밀어내고, 비워낸다. 그 결과 화면에는 화려함보다 번뇌가 자라는 시간이 남는다. 검은 먹의 굵고 가는 결은 마음의 무게를 닮았다. 글자는 단정하지 않고, 균형을 일부러 흔든다. 이는 시가 말하는 내면의 균열과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를 시각화한 선택이다. 장미의 붉음은 장식이 아니라 통증의 색이며, 여백은 도피가 아니라 각성의 공간이다. 글과 그림이 분리되지 않는 K-그라피의 미학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시는 읽히는 동시에 보이고, 그림은 보이는 동시에 말한다. 작품의 후반부,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 아니 /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에 이르면, 선택지는 셋이다. 정지(얼음), 자립(나무), 소멸(낙엽). 이명순의 붓은 어느 하나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갈림길의 정직함을 화면에 남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어둠은 언제나 크고, 빛은 늘 작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작은 빛 하나로 방향을 정한다. 이경진 작가의 ,나는 반딧불,은 거대한 광명을 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태워 길을 밝히는 미약한 생명의 빛, 그 이름 없는 존재의 윤리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굵은 필획은 외침처럼 보이지만,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외침이 아니라 다짐임을 알게 된다. “나는 반딧불이다.”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고백이다.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될 때... 이 작품에서 글씨는 정보가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기 이전에 태도를 드러낸다. 붓은 단정하지 않다. 먹은 번지고, 획은 떨리며, 화면에는 황금빛 점들이 흩뿌려져 있다. 이는 완결을 거부한 흔적이자, 삶의 불완전성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K-그라피가 된다. K-그라피는 잘 쓰인 글씨를 말하지 않는다. 잘 정돈된 그림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획에 삶이 있는가.” 반딧불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어둠을 밝힐 뿐이다 작품 속 서사는 낮고 조용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언어 대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잠시 빛나는 존재의
K-그라피 이존영 기자 | 황보근형의 K-그라피 작품 「너에게 길이다」는 ‘보여주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건네기 위한 마음’으로 쓰인 글이다. 이 작품에서 ‘길’은 방향이 아니다. 도착지가 아니라 태도이며, 가르침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에게 길이다”라는 짧은 문장은 상대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네 곁에서 함께 걸어주겠다.” 먹의 흐름은 단정하지 않다. 획은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이어진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안다. 이 길은 완성된 사람이 내미는 길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내어놓은 길임을... 작품을 채운 연한 노랑과 초록의 색감은 봄의 식물처럼 말이 없다. 위로하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괜찮다”고, “지금 속도여도 된다”고 말하는 색이다. K-그라피는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삶의 문장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황보근형의 이 작품은 ‘너를 고치려는 글’이 아니라 ‘너를 기다리는 글’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다. 기도에 가깝다. 누군가의 하루 앞에 조용히 놓아두는 한 줄의 등불이다. 작가노트 | 황보근형 너에게 길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문장이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존영 기자 | 바다는 늘 흔들린다. 그러나 흔들림 위에 선 존재가 있다. 신지연 작가의 '해응영일도'는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 끝, 독수리는 날지 않는다. 대신 선다. 이 그림에서 비상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다.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은 희망의 은유이되, 감상적이지 않다. 붉은 태양은 응시의 대상이고, 독수리는 그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민화 속 영웅은 언제나 과장된 힘을 갖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알고,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해응영일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결기의 형상이다. 파도는 시련을, 바위는 책임을 뜻한다. 그 위에 선 독수리는 ‘지금’의 무게를 견디는 존재다. 이 장면에서 K-민화는 과거의 길상吉祥을 오늘의 태도로 바꿔 놓는다. 희망은 도망치지 않고, 현실 위에 선다. 신지연 작가의 작품은 절제되어 있다. 색은 낮고, 선은 분명하다. 이는 감정을 부풀리기보다 판단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그림은 위로보다 각성을 택한다. “날아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서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K-민화는 삶의 가장 험한 자리에서도 품격을 잃지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존영 기자 |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박한 민화’라는 고정관념에 머물 수 없다. 한현숙의 작가의 '비파공작'은 민화가 지닌 길상성에 당당한 아름다움과 존재의 위엄을 동시에 불어넣는다. 작품을 가득 채운 공작은 숨기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서 있는 공작의 자세는 과시가 아니라 자각이다. 자신의 빛을 아는 존재만이 이토록 고요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공작은 예로부터 부귀, 영화, 덕성을 상징하는 길상 조류였지만, 이 작품에서 공작은 상징을 넘어 완성된 존재의 태도로 등장한다. 비파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열매는 풍요와 다산, 결실의 의미를 품고 있다. 이 풍경은 우연한 장식이 아니다. 비파는 긴 시간의 축적 끝에 맺히는 열매다. 즉, 이 그림의 화려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공작의 찬란한 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색채의 운용은 절제 속의 화려함이다. 녹청과 군청, 황금빛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살린다. 이는 K-민화가 지닌 미덕, 즉 ‘조화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결과다.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장식적이지만 가볍지 않다. '비파공작'은 말한다. 진짜 복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이 아
K-민화 이존영 기자 | 유성만 작가의 이 그림 앞에 서면 먼저 속도가 느려진다. 유성만 작가의 '休휴식'은 무엇을 보여주기보다, 보는 이를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그림이다. 숲은 빽빽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나무들은 서로 기대지 않으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서 있고, 화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스며 나온다. 이 빛은 태양도, 인공의 조명도 아니다. 마치 숲 자체가 숨을 쉬며 내뿜는 호흡처럼 느껴진다. 쉼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존재가 제 자리를 회복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상태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말한다. 화면 속 작은 새 한 마리는 이 숲이 정지된 공간이 아님을 알려준다.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생명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이 ‘휴休’는 정적이 아니다. 한자 ‘休’가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 쉼을 얻는 형상인 것처럼, 이 그림의 쉼은 자연에 몸을 맡긴 채 다시 살아갈 힘을 고르는 과정이다. 유성만 작가의 숲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절제된 색과 반복되는 수직의 리듬은 마음의 파동을 가라앉힌다.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쉼은 종종 소비의 형태를 띠지만, 이 작품은 말한다. 진짜 쉼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 상태, 그저 존재로